[모리 카오루 내한 특집] <엠마>, 만화에 숨을 불어넣는 장인정신의 시작

〈신부 이야기〉,〈엠마〉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 모리 카오루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습니다. 모리 카오루의 독특한 필치와 장인정신, 그리고 환상을 그려낸 아름다운 세계는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SWI에서는 모리 카오루의 방한을 기념하여 ‘모리 카오루 내한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모리 카오루의 대표작인 〈신부 이야기〉와 〈엠마〉, 그리고 모리 카오루라는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의 이야기를 만나볼 시간입니다.​

모리 카오루의 작품 <엠마> 4권 표지. 이미지 제공 = 대원씨아이

<엠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리 카오루의 작품 스타일
모리 카오루라는 이름을 마주했을 때 흔히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복식 작화에 대한 집착이다. 동서양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의상의 장식이나 복잡한 문양 따위에서는 모종의 광기마저 느낄 수 있다. 비단 한 작품에서만 그러한 기행(?)을 선보인 게 아니라, 데뷔작부터 현재까지 만화를 연재하는 동안 쭉 같은 태도를 고수해 온 만큼 이제는 ‘복식 문화를 향한 집착’을 모리 카오루의 작품 스타일이라 말해도 좋을 테다.

<엠마>는 그런 모리 카오루가 작가로서 끼운 첫 단추와도 같은 작품이다. 런던에서 입주 메이드로 일하는 엠마와, 엠마에게 반한 무역상 집안의 도련님 윌리엄을 중심으로 19세기 말 영국의 문화를 좁고 깊게 보여주는 데뷔작이자 대표작 중 하나다. 당연하게도 모리 카오루 개인의 취향이 더없이 반영된 덕분에 작화에서는 엠마를 비롯한 메이드들이 입은 메이드복의 디테일이나, 사교 모임장의 화려한 인테리어 양식, 귀족들의 저택 곳곳을 수놓고 있는 작은 소품들까지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부분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심지어는 캐릭터들이 입고 벗는 의상을 자세히 그리기 위해 몇 페이지를 통째로 할애하기까지 할 정도다.

이렇게 모리 카오루가 심혈을 기울여 묘사하는 장면은 다른 작품이라면 압축 혹은 생략되기 쉬운 부분이다. 아무래도 만화에서는 움직임에 따라 펄럭이는 메이드의 스커트 자락보다, 새로운 적과 함께 출현하는 다음 사건이나 캐릭터들의 관계 진전이 엿보이는 순간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엠마>에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장면과 후자에 해당하는 장면이 거의 동등한 위치에 놓인다.

예를 들어, 5권에는 무려 4페이지가(76쪽~79쪽) 대사 하나 없이 엠마가 외출복을 벗고 메이드복으로 갈아입는 컷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런던에서 윌리엄과의 재회를 마치고 멜더스 가로 돌아와 마음을 추스르는 장면이지만, 정작 페이지 위에는 엠마의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 표정보다 엠마가 입은 의상과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한 컷이 훨씬 많다. 여기에는 앞서 말했듯 모리 카오루가 가진 복식에 대한 집착이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에서 이처럼 복식이 극도로 강조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해도 별다른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캐릭터의 감정이나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아니라, 작가가 임의로 강조하려 하는 그 외의 요소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심지어는 여러 번 등장해도 작품에는 위화감이 없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엠마>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만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된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는 만화이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시대를 체험시키는 만화
어째서 말하려 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려 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품의 주인공인 엠마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엠마는 기본적으로 지극히 말이 적은 캐릭터다. 1권의 후기 페이지를 보면 “말이 없고 미인이고 부끄러움이 많은” 엠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확인할 수 있다. 재미있는 건 만화에서 가뜩이나 적은 엠마의 말수를 더욱 줄이는 서술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1권에는 엠마가 새 안경을 선물해 주겠다는 윌리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는 대목이 있다. 거기서 선물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엠마의 생각의 흐름은 독백이나 혼잣말 등의 텍스트로 나타나지 않는다. 엠마는 단지 고용인인 켈리 부인이 현재 사용 중인 안경을 처음 사주었을 때를 떠올리며 거울 속 얼굴에 얹힌 낡은 안경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이어지는 다음 페이지에서는 이미 쓰던 안경을 계속 사용하기로 마음을 정한 후, “정말 괜찮아요. 지금 이대로.”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캐릭터의 입을 빌리지 않고 ‘보여주는’ 것으로만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은 엠마를 비롯한 다양한 캐릭터들에게 자주 쓰이곤 한다.

물론 엠마와 윌리엄의 마음이 깊어질수록 앞서 서술한 것 같은 사사로운 이야기의 비중은 거의 줄어들고, 두 사람의 계급을 초월한 사랑과 관련된 사건들이 이어진다. 작품의 제 2국면은 거주지가 다른 도시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켈리 부인의 죽음 이후 엠마는 런던을 떠나 무역상 멜더스 가의 메이드로 들어가고, 윌리엄은 실의에 빠져 그동안 멀리해 왔던 사교계에 얼굴을 자주 내비치려 한다. 동시에 이때부터 작품의 배경인 19세기 말 영국 상류층의 생활문화상이 집중적으로 묘사된다. 파티, 무도회, 다과회 등 끊이지 않는 사교계의 이벤트와 오페라로 대표되는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상류층의 윤택한 생활을 지탱하고 있던 메이드와 집사들의 업무 양상이 교차하며 그려진다.

엠마는 사랑하는 사람과 허무하게 이별한 뒤로도 줄곧 말이 없다. 켈리 부인의 죽음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멜더스 가에 들어가 새로운 일자리에 적응하고, 윌리엄과의 관계는 일절 입에 올리지 않은 채 가끔 눈물을 흘릴 뿐이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힘껏 맞서지도, 그러나 윌리엄을 잊지도 못하는 엠마의 모습이 때로는 답답하게 비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엠마는 윌리엄과의 관계에 있어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모습일 수밖에 없다. 앞선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엠마>는 시대에 저항하고 원하는 것을 쟁취할 줄 아는 캐릭터를 앞세워 어떤 가치를 주장하고자 하는-무언가를 말하려는 만화가 아니라, 시대와 문화를 성실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고자 하는-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만화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작품이라면, 엠마는 운명에 저항하는 캐릭터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다. 계급 차이라는 한계를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극복하고 나아가려 하는 진취적인 인물상은 19세기 말 영국에서 매우 찾기 힘든 캐릭터이겠지만, 만화에서라면 결코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엠마>의 모리 카오루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시대를 재구성하는 방식 대신 ‘재현하는’ 방식을 택하는 작가다. 그래서 작품의 첫 장에 “(…) 동시에 오래된 생활 습관과 계급사회 역시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 있고 여전히 길에는 마차가 오가던 시대.”라는 서술이 존재하는 한, 메이드 계급인 엠마는 결코 윌리엄이 행동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항상 말이 없고 수동적인 엠마의 모습은 당시 영국의 계급 사회가 얼마나 공고했는지를 보여준다. 작품에서 말이 많고 주장이 강한 여성 캐릭터들이 몇몇 등장하지만, 그들이 전부 상류층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엠마의 수동적인 태도를 한결 이해하기 쉬워진다.

따라서 당연히 어느 정도의 만화적 과장은 들어가 있겠지만, 작품에 묘사된 19세기 말의 영국 문화는 매우 자세하고 또 정확한 편이다. 본디 빅토리아 시대와 메이드에 대해 광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모리 카오루와 편집부의 협력에 의한 자료조사가 이루어진 덕에, 작품에서는 엠마의 치맛자락이나 상류층들의 헤어스타일 같은 복식 문화부터 시작하여 아름다운 건축 및 인테리어 양식, 그리고 계급에 따른 생활의 차이로 대표되는 사회문화 전반까지를 알아볼 수 있다. 정확하고 섬세하게 당시의 문화를 재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재현을 통해 겪어보지 못한 시대를 간접 체험하게 한다. 거기에 모리 카오루의 공력이 잔뜩 들어간 작화가 더해져 <엠마>는 끝내 작가의 장인정신을 10권 내내 펼쳐 보이는 작품이 된다.


알아도 쉽게 만들 수 없는 디테일의 힘
더불어 <엠마>(를 비롯한 모리 카오루의 만화)에서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 어린 묘사를 함께 기대해 볼 수 있다. 엠마와 윌리엄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서사는 7권으로 깔끔하게 막을 내리고, 이후 번외편에 해당하는 8권부터 10권까지의 3권 동안은 앞선 7권 동안 등장했던 조연들의 전일담 혹은 후일담이 이어진다. 조연이라고는 하지만 비중 있게 다루어진 캐릭터들이 대부분이기에 본편을 재미있게 본 독자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윌리엄에게 파혼당한 엘러너가 어떻게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지, 인도의 왕자 하킴과 윌리엄의 어린 시절 첫 만남은 어땠는지, 멜더스 가의 무뚝뚝한 메이드장 아델레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메이드 일을 계속해 나가는지 같은, 꽤나 귀가 솔깃해질 만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작품에서 조연들은 단지 엠마와 윌리엄의 사랑이 성취되는 것을 돕거나 막는 캐릭터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당시를 살아가는 개별적인 존재로서 번외편의 또 다른 주인공들로 자리매김한다. 때문에 독자들은 기본적으로는 ‘신분(계급)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라는 익숙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쉽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엠마>는 비교적 평범한 이야기를 디테일이 얼마나 살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그리고 그런 <엠마>를 그린 모리 카오루는 정말이지 집요한 작가다. 아무리 손이 빠르다고 해도 시간을 한참이나 필요로 하는 화려한 의상에 혼을 갈아 넣거나, 언뜻 봐도 상당한 배경 조사가 필요할 듯한 상황과 캐릭터를 여럿 등장시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만화가 확실한 힘을 지니게 된다는 걸 알아도 시간과 능력의 제한으로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테다. 하지만 수고로운 작업이 있기에 현재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만화 속의 시대가 생생하게 다가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들은 독자를 작품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지니게 된다. 최종권 마지막 에피소드인 윌리엄과 엠마의 결혼식 편이 뻔하지만 미소를 자아내는 이유는 분명 모리 카오루가 10권 내내 차곡차곡 쌓아온 정성과 애정에 있다.

이러한 <엠마>의 장점들은 모리 카오루의 차기작이자 현재 연재 중인 만화, <신부 이야기>에서 십분 활용되고 있다. 해당 작품에서는 ‘신부 이야기’라는 제목에 들어맞는 다양한 이야기가 여러 캐릭터들의 시점에서 별개의 에피소드로 분리될 듯 계속해서 이어진다. <신부이야기>는 명실상부 현재 모리 카오루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이지만, <엠마>에서 먼저 거친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연재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그러니 <신부 이야기>를 통해 모리 카오루라는 작가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시작점에는 과연 어떤 작품이 존재하는지 이번 기회에 확인해 보면 좋겠다. 한 작가의 장인정신이 발전해 온 궤적을 따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 그야말로 둘도 없는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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