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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 장르는 뻔하다. 어차피 주인공의 욕망대로 실현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로맨스판타지의 뻔하다는 평가는 장르물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독자는 예상되는 바를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기대로 장르물을 감상하고 독자가 기대하는 장르물에서의 새로움은 기대한 바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허용된다. 그래서 장르 규칙에 매료된 독자는 다시 만족을 느끼기 위해 그 장르를 선택하고 장르물은 이러한 과정의 반복으로 대중화되며 뻔한 재미에 의지한다. 한편에서는 장르물이 주는 뻔한 상투성과 진부함이 재미없는 이유라고 지적한다.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는 감상의 지평을 넓히긴 어려울 것이란 우려다. 로맨스판타지도 이 우려를 고스란히 받고 있다.
로맨스판타지가 뻔해서 감상의 지평을 넓히지 못하고, 재미가 없다고?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갸웃할 것이다. 독자는 로맨스판타지가 장르의 상투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다시 써가며 새로움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로맨스판타지의 재미를 둘러싼 서로 다른 기대와 우려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양측이 말하는 ‘재미’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작가가 되어 쓰는 로맨스판타지
로맨스 판타지의 주인공은 잘 알고 있는 이세계에 엑스트라나 악역, 비중이 적은 조연처럼 원작에서 주목받지 못한 캐릭터로 빙의해 이야기를 변형한다. 잘 알고 있는 세계라는 것은 주인공에게 엄청난 권능을 선사한다. 원작을 토대로 패러디 작품을 쓰는 한 명의 작가 시선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대부분 주인공의 뜻대로 된다. 주인공이 신처럼 군림하여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이야기의 긴장감은 유지되기 어렵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인공이 우리가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납작하게 설정된 악녀나 이름조차 부여되지 않았던 엑스트라, 조연으로 빙의한다는 것이다. 타 장르에서 악역이나 엑스트라, 조연이 등장하는 이유는 주인공 위주의 이야기를 진행 시키기 위해서다. 그들의 행동이나 대사는 주요한 관심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로맨스판타지의 주인공은 그들의 행동과 대사에 의문을 품고 다른 생각을 가졌던 이들이다. 그래서 로맨스판타지는 주인공이 작가가 되어 쓰는 한 편의 패러디가 된다.
‘나’대로 살기를 욕망하고 연대하고 실현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로맨스판타지의 길항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수많은 이야기에서 보인 캐릭터 유형에 저마다의 사연을 부여해서 이야기가 진부하게 생성되려 할 때마다 방해하고, 이 장르를 많이 읽은 독자라면 느꼈을 법한 바람이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표현해 재미를 선사한다.
<그 악녀를 조심하세요!>에서는 ‘뻔한 스토리의 소설’ 속 악녀로 빙의한 주인공(멜리사 포데브라트)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원작처럼 악녀로 살거나 개과천선해서 성녀가 되거나 남자 주인공들의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 따윈 없다. 그저 조용히 공작가의 영애(돈 많은 백수)로 살고 싶기에 약혼자인 황제에게 ‘파혼’해달라는 서신을 49번이나 보낸다. 주인공은 파혼을 요구하는 와중에 멜리사가 악녀로 비춰진 이유를 알게 되는데 악녀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정의된 이름이란 것이다. 주인공은 멜리사의 악녀라는 설정을 이용해 멜리사가 멜리사 자체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게다가 원작에서는 적대적 관계였던 유리(원작의 주인공)와 ‘여적여’ 관계를 뛰어넘어 연대함으로써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다.
로맨스판타지에서 보여야 할 멋있고 지체 높은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그 악녀를 조심하세요!>에서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보기에 네 명의 남자 주인공은 바람둥이, 스토커, 철부지, 집착남으로 보일 뿐이므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고 수동적으로 사는 유리를 가만히 두고 볼 수 만은 없다.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유리와 연대함으로써 기존의 로맨스 장르에서 보이던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을 보여준다. 로맨스, 로맨스판타지를 떠올릴 때 자동으로 그려지는 이야기의 뻔함을 보란 듯이 벗어던지는 담대함과 통쾌함은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로 다시 써졌다.
논리가 빈약해도 납득되는 주인공의 특혜
<빙의자를 위한 특혜>는 대빙의 시대를 맞아 누구나 빙의할 수 있는 세계관 속에서 주인공이 죽기 전 가입한 생명보험의 덕으로 S급 빙의자가 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소원대로 ‘생존 난이도가 낮’고 ‘꽃길, 돈길이 보장된 최고 장르’인 로판 육아물 속 아일렛 로델라인에 빙의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공작가의 영애가 아닌 공작가 사용인의 딸로 빙의한 주인공은 원작의 내용도 기억 못 하지만 S급 빙의자인 덕분에 이세계의 비밀을 알려주는 상태창과 신의 가호 등에 힘입어 어려움을 헤쳐간다.
사실 원작의 아일렛은 신분과 나이상 약자에 속해서 다른 이들의 이익과 비교했을 때 평등하게 보호받고 증진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배려(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가 필요하다. 그런데 주인공이 아일렛으로 빙의한 이상 배려는 필요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미 주인공이 ‘특혜(특별한 은혜나 혜택)’를 얻어 빙의해서다. 본래 로맨스판타지 주인공은 잘 알고 있는 세계에 빙의해서 이전 삶의 경험에서 쌓은 정보나 지식, 기술로 모든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는 특별한 존재로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의 주인공도 죽기 전에 구입한 ‘빙의생명보험 풀패키지’를 최초로 구입해서 이세계 치트키를 얻는데, 노력을 통한 정당한 보상도 아니고 사회적 배려를 통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얻은 치트키는 ‘특’별한 ‘혜’택이며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사건도 원하는 대로 이뤄질 것이다. 그래도 독자는 읽는 순간만큼은 주인공의 욕망 위주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의 특혜를 납득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이 특혜가 독자의 욕망과 일치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본 칼럼의 후일담은 팟캐스트 '웹투니스타'의 파일럿 방송 <그 비평가가 로판에 고료를 탕진한 사연>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