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출판만화] 대만의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 "대만의 소년"
유페이윈 글, 저우젠신 그림 <대만의 소년(1-4)>, 2024, 마르코폴로
<대만의 소년>은 프랑스의 에밀 기메 문학상(Émile Guimet Prize for Asian Literature)에서 2024년 신설된 그래픽 노블 부문 첫 수상작이 되었다. 스토리 작가인 유페이윈은 수락 연설에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차이쿤린의 회복력을 젊은 세대에게 가르치기 위해 출판되었다고 말했다. 대만에서 아동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유페이윈은 어린이 잡지 <왕자>, <유년>, <공주>를 창간하고, 미술관 설립을 준비해 초대 관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백과사전을 출판했고, 광고회사에서 꾸준히 일했던 차이쿤린의 일대기를 대만 현대사와 함께 네 권의 만화에 녹여냈다.
대만과 한국은 모두 일본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독재정권이 오래도록 집권한 역사를 갖고 있다. 대만과 한국은 싱가포르, 홍콩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고도성장을 이룬 작가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 불리기도 했다. 두 나라는 1992년 단교 후 ‘자유중국’의 자리를 ‘중국’이 차지하며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그즈음 대만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87년 38년 동안 지속됐던 대만성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1988년 장제스 총통의 장남 장징궈 총통이 사망한 후 민주화가 진행되며 1992년 최초의 입법위원 선거, 1996년 총통 직선제가 실시되었다. 2000년 야당인 민주진보당 천수이벤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며 최초로 정권교체가 되었고, 2014년 ‘3·18 해바라기 학생운동’이라 불리는 친중 마잉주 정권 퇴진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TSMC의 나라로 유명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대만에 대해서는 얄팍한 민족적 감정을 자극하는 유튜브 채널의 콘텐츠가 더 익숙하다.
<대만의 소년>은 차이쿤린의 일생을 통해 대만 현대사를 꼼꼼하게 재현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지는 부분도 많고, 한쪽 면의 물감이 번져 다른 모양을 만들어보이기도 한다. 어느쪽이라도 쿤린의 삶을 통해 만나는 대만 현대사는 마치 거울처럼 한국을 비춘다. 그러니 생각이 깊어진다.
차이쿤린은 1930년 12월 18일 대만 타이중 다자군 칭수이 차이 집안에서 여덟째로 태어난다. 차이 집안은 청나라 학자 집안. 중국의 전통 속에서 살며 일상적으로 대만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중국어도 섞어 사용한다.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만을 지배한 일본의 교육을 받았다. 유치원에서 창씨 개명을 한 ‘기미코’ 선생님에게 일본 동요를 배우기도 한다.
<대만의 소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중국어, 대만어, 일본어를 뒤섞어 구사한다. 1권에서 쿤린의 성장기인 일본이 지배하던 대만의 일상적인 풍경을 스케치하는데, 형과 함께 연등행열에 참여하는 장면에서 한참을 멈추게 된다. 사람들은 동그란 중국 연등과(일본 연등은 세로로 긴 모양이다. 행렬에 일본 연등을 든 사람도 나오지만 대부분 중국 연등을 들었다) 일장기, 황군의 승리를 축하하는 문구를 쓴 깃발을 함께 들고 신사에 올라간다. 그곳에서 형제들은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중국 수도 난징을 점령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는다. 형이 중국어로 말한다. “난징이 함락되었다는데.” 쿤린이 중국어로 묻는다. “함락이 뭐야?” 다른 형이 대만어로 답을 한다. “우리가 이겼다는 거야. 황군이 난징을 점령했다고.” 지금까지 연필선에 살구색 수채로 인물의 그리다가 그 다음 칸은 신사와 휘날리는 깃발을 마치 판화처럼 검정색에 선만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연등행열에 나온 사람들은 일본어로 만세를 외친다. 따뜻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에피소드 사이에 폭력과 전쟁이 똬리를 튼다.
책읽기를 즐겨한 쿤린이 타이중 제1중학교에 시진학 시험을 보기 전 안경을 맞추러 가던 1942년 12월에 진주만 공습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 다음 해 쿤린의 중학교 면접장에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면접관으로 나와 공습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되냐는 질문을 한다. 쿤린의 셋째 형 쿤찬은 육군소년비행병 시험에 합격해 일본으로 떠난다. 1945년 4월 차이쿤린은 학도병이 되어 친구들과 군용 비행장에 배치되었다. 8월에는 B29가 쿤린과 친구들이 있던 비행장에 폭격을 가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등병 쿤린은 학교로 돌아갔다. 국어 수업이 일본어에서 중국어로 바뀌었고, 국민당 정부와 함께 중국군이 대만에 진주했다. 만화는 이처럼 시대를 재현하지 평가하지 않는다.
열다섯 살이 된 쿤린은 국민당에 입당했다.내성인(원래 대만에 거주하던 한족)과 외성인(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들어온 한족)의 갈등은 무력충돌로 확대되기도 했다. 1949년 9월 쿤린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칭수이 현사무소의 공무원이 되었고, 12월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페이로 철수한다. 평안한 일상과 기이한 불안이 함께 한 1권은 헌병대 사복경찰에게 쿤린이 체포되는 것으로 끝난다.
2권 부제는 뤼다오에서의 10년이다. 독서클럽에서 책을 읽었다는 조로 뤼다오섬의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고문, 강제노동, 교화 학습으로 이어지는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흑백 펜 선과 연필 터치에 살구색 2도 컬러를 사용한 1권의 따뜻한 작화는 2권에서 거친 목판화 스타일로 바뀐다. 새벽이면 사람들이 끌려가 사형을 당하는 지옥 같은 곳에서 10년을 채우고 1960년 9월 10일 고깃배를 타고 섬을 떠날 수 있었다. 섬을 떠나는 장면에서 하늘과 바다가 푸른색으로 바뀌며 만화는 ‘그림’이 중요한 언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3권은 쿤린의 일상회복과 의지를 보여준다. 연필 선을 강조한 부드러운 스타일의 1권, 목판화처럼 거친 스타일의 2권에 이어 3권은 더 친근한 만화 스타일로 바뀌었다. 10년의 형기를 마치고 일상에 복귀한 쿤린은 자신이 뤼다오 섬으로 보내진 이듬해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일자리를 알아보던 쿤린은 신문사에 취직해 주필이 일본어로 쓰는 기사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사장이 경찰에 잡혀가자 전과가 있는 쿤린은 해고당한다. 그 뒤 바오스 출판사를 거쳐 어린이 잡지를 내던 동방 출판사에서 편집을 맡는다.
잡지가 휴간하자 동료와 만화 전문 출판사 원창 출판사를 설립한다. 일본 책 수입이 금지되었던 시대 몰래 일본 만화를 들여와 그대로 베끼거나 조금 바꿔 만화를 출판했다. 어느덧 젊은 만화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만화방으로 젊은 만화가들의 만화를 유통해 인기를 얻었지만 1966년 대만정부는 어린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며 만화를 탄압했다. 대만에서 벌어진 만화계 여러 사건들이 한국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대학에 다니며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쿤린은 정부의 탄압으로 일자리를 잃은 만화가들을 위해 어린이 잡지 <왕자>를 창간한다. 연이어 <공주>, <유년>을 창간해 살림이 빠듯했지만 시골 어린이 야구부를 지원하기도 한다. 1969년 10월 두 번이나 태풍 피해를 당한 잡지사는 결국 파산하고, 쿤린은 물론 친구와 가족들도 큰 곤란을 당한다. 큰 실패를 겪은 쿤린은 1970년 궈타이 기업에 입사한다.
마지막 4권은 2018년 현재 시점에서 등장한 쿤린의 회고로 시작한다. 1970년대 대만의 UN퇴출 이후 벌어지는 독재 체제의 균열과 1980년대 말 사회운동의 여러 모습들과 쿤린의 직장생활을 함께 연결한다. 4권은 1권과 3권에서 보여준 두 스타일을 혼합해 사용한다.
<대만의 소년>은 평범한 소년 쿤린의 삶을 통해 대만의 근대사를 보여 준다. 일본의 지배, 외성인과 내성인의 갈등, 국민당 정권의 폭력적 독재, 대만의 UN퇴출과 같은 역사의 수많은 파고를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쿤린은 역사의 파고에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힘으로 회복된다. 폭력의 벽 앞에도 좌절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의 힘이다. 작화를 맡은 저우젠신은 4권을 각각 다른 스타일로 재현하며 시대를 증언한다. 이야기, 만화, 그리고 그 안에서 빛나는 실존 인물들과 여러 컨텍스트까지 하나하나가 빼놓 수 없는 걸작이다.